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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왔다
김용란
2019.06.17 109 3
 
 
이길옥/ 그냥 왔다


열한 살 적 추억을 데리고 고향을 찾았다.
고무신 닳던 돌담 골목 휘어진 모퉁이를 더듬어
어린 혼을 감춰뒀던 구석을 뒤져보니 없다.
누가 훔쳐간 건 아닌데 보이질 않는다.
 

  

기억을 들춰보니 여기가 분명한데, 틀림없는데
그래, 그때는 돌담이었다. 돌담이어서
돌과 돌이 맞물린 틈을 세내어
꿈으로 가득 찬 유년의 얼을 차곡차곡 쟁이며 즐겼는데
그 담의 돌을 빼내 틈을 헐고 내 넋을 몰아낸 뒤
밋밋한 시멘트블록을 세워 골목을 부숴놓고
수시로 넘어 들던 이웃의 관심까지 뽑아내고 없다.
 

  

망가진 기분을 달래고 나서
내가 나고 자란 낯선 고향의 가슴을 파고드니
돌담을 타고 오르던 담쟁이 대신
벽돌담을 감싼 넝쿨장미가 예리한 가시로
한낮의 따가운 햇살을 찔러 붉은 피를 수혈하고 있다.
 

  

오싹한 두려움이 각진 골목에 고여 있다가 발목을 잡고
혼곤히 고여 있던 적막이 떼거리로 몰려들어 나를 감싼다.
 

  

아이들 웃음소리
할아버지 호령에 쫓겨 주눅이 들던
그래도 정이 불끈 솟아 원기 왕성하던 고향이 골목에
죽음의 그림자 하나 맥없이 고개를 떨구고 지나간다.
수다로 발정 나던 입이 수행 중이다.
 

  

폐가의 수가 늘고
으스스한 한기가 출렁 골목을 장악하고 발길을 거부한다.
 

  

한때 흥청거렸던 벗들의 장난질을 다시 덮고
이야기 붙일 이 없는 고샅을 부산히 벗어나
마을 어귀에서 잠깐 숨을 돌리다 
맞아주는 이 없는 고향을 등지고 
그냥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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